게임일지

루크는 왜 옷차림과 머리 모양을 갖고 고민해야 했나

틈새임프 2024. 12. 31. 19:31

베일가드에서 트랜스젠더 논바이너리 주인공을 보여주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지극히 개인적 사유에 관한 고찰

주인공 성별 선택란에 논바이너리가 포함된다는 정보가 알려졌을 때는 기뻤다. .2014년도에 나온 전작까지만 해도 (당시 흥행한 대부분의 게임들과 같이) 플레이어 캐릭터는 여성 아니면 남성이었는데 시간이 흐른 뒤에 보니 그 점은 예전 작품의 한계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선택지에 영향을 줄 것이라는 정보가 알려졌을 때는 더 기뻤다. 2020년대 이후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성별을 여성/남성으로 지칭하지 않거나 논바이너리 선택지 및 원하는 대명사 선택권을 넣은 게임들이 계속 나왔다. 그런데 내가 해 본 게임들은 그 사실이 게임 속 세계관 내에서 큰 의미를 갖지는 않았다. 애초에 누구의 성별이 어떻든 아무런 상관이 없는 세계관이었기 때문이다. 성별이 상관없게 된 성차별면에서 이상적인 인간 사회였다. 그런 세계를 가상으로나마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경험도 좋지만, 어떤 사람은 현실에서 자신이 하는 고민과 갈등을 가상 인물의 상황에 대입해서 공감을 하며 위로를 받기도 한다. 나는 세상에 그런 작품들도 많이 있어 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논바이너리라는 선택지가 실제로도 캐릭터의 삶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치는 세계관을 두 손 두 발 다 들고 적극 환영할 생각밖에 없었다. 그래서 내 루크는 게임이 나오기도 전에 논바이너리로 결정되었다. 

 

게임 초반부를 진행하는데 중대한 선택분기점을 나타내는 아이콘과 함께 선택지가 나타났다. 주인공에게 트랜스젠더 정체성을 부여할지 말지에 관한 선택지인데 여기에서 플레이어는 루크가 자신이 트랜스젠더로 정체화한 이후의 자신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정도를 정할 수 있다. 선택지를 고르면 주인공이 독백을 한다. 돌이켜보니 이걸 성별과 함께 캐릭터 생성 단계에서 고르지 않고 게임 중간에 갑자기 고르게 한 이유는 아마 제작진들이 여기서 주인공이 하는 독백이 플레이어들에게 보여줄 중요한 연출 요소라고 생각해서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고 나서 게임을 진행하다 보면 동료 캐릭터 중에 성 정체성으로 고민 중인 캐릭터가 들어온다. 얘랑 대화할 때(이게 논바이너리 전용 옵션이었는지 트랜스젠더 전용 옵션이었는지 지금 와서는 기억이 안 나는데) 선택지 중에 ‘나도 그런 과정을 거쳤다.‘라며 공감을 표하는 선택지가 있었다. 이걸 눌렀더니 루크가 하는 말에 ’나도 내 성별이 뭘까 해서 머리 모양도 바꿔 보고 옷차림도 다양하게 시도해 봤다.‘라는 문장이 포함됐다. 이 대사를 본 순간 내가 맨 처음 든 생각이… ’잠깐 왜 그걸 작가님들이 마음대로 정하세요.‘

그래서 한동안 이 대사를, 그리고 거기에 반응하는 내 감정을 이해하고 정리해 보고 싶어서 많은 고민을 했다. 자신을 논바로 정체화하는 과정에서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일까? 혹은 그게 필수적이어야 할까? 그런데 이런 생각 자체가 너무 나 자신의 개인적 경험에만 근거해서 편협한 관점으로 다른 실존 논바이너리들의 경험을 무시히는 처사가 되는 건 아닐까?

 

그러다가 게임 엔딩을 보고 나서야 이게 왜 내가 드래곤 에이지에서 만들어 주기를 기대한 논바이너리 서사가 아니었던 것인지를 다시 천천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 게임은 플레이어블 캐릭터라고 해서 주인공의 모든 것을 TRPG처럼 플레이어가 다 결정하지는 못한다. 선택지 하나를 누르면 작가들이 만들어 놓은 이야기가 붙기도 한다. 단적인 예시로 ‘너 그때 나랑 카드게임 했잖아.’라는 선택지를 누르면 주인공이 ’내가 다 졌지만.’이라는 대사를 같이 말하기도 한다. 여기서 플레이어가 카드게임 승패를 임의로 결정할 수는 없는데, 어떤 플레이어는 ’아니 내 캐릭터는 카드게임 천재라는 설정을 붙여주려 했는데 무슨 소리야?‘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말하자면 내가 느낀 감정도 이런 맥락이었다. '내 루크는 그러지 않았는데요.' 그래서 나는 왜 섣불리 내 캐릭터는 머리 모양과 옷차림 바꾸기를 시도한 트랜스젠더 논바이너리가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지를 따져 봤다.

 

지금까지 전작 1, 2, 3편을 하는 동안 거기서 비춰진 테다스라는 세계는 현실만큼 성차별적인 세계와는 거리가 먼 곳처럼 보였다.

오리진 때부터 플레이어블 캐릭터를 생성할 때 '이 게임의 배경이 되는 사회에서는 남성과 여성의 역할 차이가 없다.'라는 설명이 나온다. 실제로 캐릭터들의 성별은 지위고하에 막론하며 주인공이 상대하며 죽여야 하는, 랜덤 생성되는 양산형 적 캐릭터들도 남성도 나오고 여성도 나온다. 가끔 작중 캐릭터들과의 대화에서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에 의해 무시당하기 쉽다'라는 늬앙스를 내비치는 경우도 있고 거기에 소신을 표할 수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스토리를 진행할 때 성별에 의해 제한되는 선택지는 없다.

그럼 스타일은 어떤가 하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남성이건 여성이건 거기에 따른 복식 차이나 머리 모양 차이마저도 없다. 어느 쪽이든 공평하게 못생긴 옷과 빡빡머리를 제공해줬다.

그렇다고 해서 성별이 완벽하게 의미가 없는가 하면 그건 아니었다. 성별이 가장 큰 어쩌면 유일한 영향을 미치는 선택지는, 동료 캐릭터들의 성 지향성에 따른 로맨스 가능 여부였다. 동성애자인 남성 동료 캐릭터하고는 남성 주인공만 연애를 할 수 있는 식이었다. 그러니까 '주인공을 논바이너리로 설정할 수 있고, 거기에 따라 선택지도 달라진다.'라는 말을 봤을 때 내가 기대했던 것은 다른 게 아니라 우선 로맨스 관련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이 게임에서 논바이너리 혹은 트랜스젠더라는 정보값이 쓰이는 상황은 다 위에서 말한 저런 대사들에서였다. 

 

이런 식이면 이 게임의 배경에 해당하는 북부 테다스가 전작에서의 남부와 달리 성차별적이라는 얘기밖에 더 되나? 어쩌면 작가들이 마음을 먹기에 따라 실제로 그렇게도 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게 오히려 더 내 마음에 들었을지도 모른다.

1편에서 쿠나리들은 성별에 따라 사회적 역할이 고정되어 있다는 설정이었고, 쿠나리 캐릭터가 그렇지 않은 남부 사회를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 적 있었다. 그러다가 3편에서는 태어난 성별과 다른 성별로 살아가는 사회 일원도 있다는 설정을 추가하고 트랜스젠더 쿠나리 캐릭터를 만들어 넣었다. 또 남성에서 여성으로 트랜지션한 테빈터인 캐릭터가 언급된 것도 3편이었다. 그러니까 북부 테다스를 남부와 달리 기본적으로 성 역할이 고정되어 있는 사회로 설정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트랜스젠더 캐릭터들의 삶을 깊이 있게 그려내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지 않은 이유는 알만하다. 애초에 이 게임의 스토리에서는 뭐가 됐든 깊이 있게 다루려는 모습이 안 보이고, 전체적으로 최선을 다해서 가볍다. 전작을 안 한 사람도 즐길 수 있도록 전작들의 설정들을 많이 날려버렸고, 현실의 문제를 떠올릴 수 있는 사안들도 최대한 별 문제가 안 되도록 만들어 놨다. (그러나 발매 한 달 뒤에 한국인 플레이어들에게 게임 몰입을 할 수 없게 만드는 현실의 어떤 문제가 닥칠 거라고까지는 예측 못 했겠지만)

전작까지는 테다스 사회의 부조리함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특히 주인공이나 동료 캐릭터들도 사회적인 차별을 겪을 수 있고, 주로 종족, 문화, 마법사 여부 등을 통해 나타났다. 나는 현실의 문제에 판타지 세계관이라는 스킨을 한 단계 덧씌워서 현실과의 거리를 두면서도 현실에서 비슷하게 겪을 수 있는 일에 대한 공감을 할 수 있다는 점을 좋아했다. 하지만 이번 게임에서는 그런 묘사는 볼 수 없었다. 테빈터에서 노예 취급받는다던 엘프, 네바라 바깥에서 부정한 혈마법사 취급받는다던 모탈리타시의 모습 같은 것들은 보이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애초에 성 역할에 대한 사회적인 고정관념이 없는 사회에서 성 정체성으로 고민하는 캐릭터가 완성된 것이다. 주변 캐릭터들은 전부 천편일률적으로 ‘그렇구나. 정체성을 깨달았다니 잘 됐네.’ 하고 받아들이고 넘어갈 뿐이다. 그 때문인지 루크의 대사들은 작중 등장인물들이 아니라 마치 ‘트랜스젠더, 논바이너리란 이런 거야.’를 모니터 너머 현실의 비트젠 비논바 및 차별주의자들에게 설명하고 싶어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이 때문에 실제로 차별주의자들에게서 악플과 공격을 받는 경우도 잦다는 모양이다. 한편으로는 이런 대사가 누군가의 인식을 바꿀 수도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질 수는 있다. 또 누군가는 이 대사에 현실 그 자체를 대입해서 공감할 수도 있다. 그런 것들을 생각해 보자면 나도 게임이든 무슨 창작물이든 이런 시도가 무의미하거나 불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데, 이 시점에 정말 창작물 속의 트랜스젠더와 논바이너리를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이 저것뿐일까?! 그리고 당연하게도 트랜스젠더와 논바이너리도 이 게임을 하는데, 단순한 등장인물의 대사가 아니라 플레이어가 본인을 대입하기 쉬운 주인공의 입에서 나온 대사로 공감을 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제작진은 했다는 걸까?



확실히 나는 게임을 통해 나를 대입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될 수 있다면, 현실의 차별주의자들을 향해 일갈하는 기분을 느끼기보다는 세계관 속 인물들과 소통하는 것을 더 즐기는 편이다. 그걸 주로 드래곤 에이지 시리즈를 통해서 해 왔고. 그래서 단순하게는 기대를 했던 만큼 실망이 컸다고 할 수도 있겠다. 이 모든 깊은 생각을 하게 된 원인이 '머리 모양과 옷차림'이라는 언급 때문이었음을 생각해 볼 때, 트랜스젠더 및 논바이너리가 자신을 정체화한 과정을 조금 더 작품 속 세계관을 통해서… 아니 지금 제작진들이 그럴 리가 없지. 다음 편을 기대하기에는 어차피 기존 세계관에 관심도 없어 보이던데. 아무튼 이 게임의 저런 대사들이 다른 누군가한테 공감과 위로를 줬다면 그건 분명 좋은 일이지만, 다른 방식에서 공감과 위로를 얻던 사람도 분명히 존재한다는 걸 게임을 만드는 데 필요한 돈줄 쥔 모든 이들이 알아줬으면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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